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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 신화
by 전지호
“ 「달로」는 전지호 작가의 『보름달 신화』에서 영감을 받아 쓴 산문시이다. 『보름달 신화』는 알투스에서 책을 고를 때 가장 먼저 고른 책이기도 하다. 나 역시 일찍이 달에 매료되었던 영혼이기에 친근감을 느꼈고, 한편으론 슬프기도 했다. 언제나 ‘여기’를 떠나고 싶어 하는 뿌리 약한 영혼들. 그들에게 달은 가장 먼저 꿈꾸어보는 ‘저기’가 아닐는지. 이 글은 그들에 대한 공감과 위로로 만들어졌다. 그들은 완전히 뿌리내리지 못하는 대신 다른 세계를 열망하고, 혹은 한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들이라 썼지만 우리라고 믿는다. ”
이유리
달로
이유리
어떤 사람들은 달로 간다. 그늘진 세계로 간다. 낙오된 자들만이 헤집어보는 세계가 있다. 넘어진 뒤에야 발견하는 풀어진 신발 끈처럼. 아무것도 쥘 수 없게 된 뒤에야 쥐어보는 맨손의 차가움처럼. 그 세계는 온다. 이 생에 대한 몰수처럼.
어린 시절 Secret Garden의 「Nocturne」이 흐르는 차 안에서 올려다본 달. 제사를 지내고 돌아가는 길. 어린아이에겐 생경했던 자정 너머의 어둠. 그 어둠 속에 가만히 누워 차창을 올려다보면 조약돌 같은 달이 우릴 쫓아오고 있었다. 차 안에 출렁이던 애수 충만한 음악들. 그 음악들로 애수를 알고 가슴을 앓던 어린 나. 신병에 걸린 것처럼 아름다운 설움에 시달리는 나를 끝끝내 쫓아와 어르고 달래준 달. 설움에 가려진 아름다움을 알려준 달. 내 유년에 잔상을 남긴 최초의 달. 그 달의 지문이 지금도 내 아득한 밑바닥 어딘가에 흐리게 남아 있다.
달의 인력에 이끌리는 이들이 있다. 당겨졌다고 믿으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달을 당기는 사람들. 그렇게 여기를 떠나 저기와 가까워지려는 사람들. 중력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해 추락을 승천으로 오독하는 사람들. 자서전을 밤의 어둠으로만 채우려다 눈물 한 방울 떨구듯 자그맣게 달을 그려 넣는 사람들. 달이 썰물과 밀물을 만들 듯 당기고 당겨지며 영혼에 파랑을 만드는 사람들. 그리하여 언젠가는 광포한 운명의 해일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를 꿈꾸는 이들.
죄악으로 점철된 도시일수록 달은 크게 떠오른다. 정화를 위해서인지, 강도의 굴혈을 비추기 위해서인지는 알 길 없으나. 도시를 매단 거대한 풍선처럼 달은 떠오른다. 그런 달을 본 적이 있다. 중국의 어느 항구 도시였다. 네온사인은 발정 난 수캐처럼 헐떡이고. 길바닥엔 담배꽁초와 복숭아 껍질이 엉겨 붙고. 담배 연기가 달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뻔하디뻔한. 그렇고 그런 도시. 달은 거대한 시계태엽처럼 들쭉날쭉한 건물들 뒤에 자리하고 있었다. 밤을 설계하듯. 종말을 계산하듯.
그곳에서 사람들은 남들보다 조금 더 긴 그림자를 이끌고 다녀야 했다. 가진 것이 적을수록 그림자는 길어졌다. 때로 그것은 그들이 지닌 부채의 길이와 일치했다. 부채는 탯줄로 이어져 있었고 그들은 그것을 끊어내려 했으나. 끊어져 나간 것은 결국 그들 자신이었다. 남은 것은 주인 잃은 그림자뿐. 그림자는 원귀가 되어 도시를 채찍질하고 기다란 혀가 되어 살아 가져보지 못한 것들을 핥는다. 나는 내 짧은 그림자를 보호하며 생각했다.
밤은 그림자가 메아리치는 시간이다.
달은 고개 가눌 힘조차 없어 땅만 보고 걷는 이들에게, 혹은 자진해서 어둠의 뒤안길로 숨어 걷는 이들에게 밤하늘을 올려다볼 이유를 제공한다. 태양은 그렇지 않은데, 달은 오직 나만을 비추고 있다는 착각이 들 때가 있다. 달이라는 거대한 동공. 그 온기도 윤기도 없는 눈동자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그리하여 이 밤 혼자가 아니라는 구차한 위안을 달에, 혹은 스스로에게 구하는 것이다.
달은 약 45억 년 전 지구와 다른 행성의 충돌로 태어났다. 달은 아프리카에 나타난 최초의 인류로부터—아마도—어디서 멸할지 모르는 최후의 인류까지 그 모두를 지켜볼 것이다. 달은 이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주었다. 볕 들지 않는 개인의 비극을 위로해주었다. 이제는 너무 낡은 지구라는 무대. 더더욱 보잘것없어진 인간은 여전히 애타게 달을 기다린다. 실패와 몰락의 예감을 느낄 때 달은 언제나 거기 있었다. 실패와 좌절의 존재를 수긍하듯. 실패와 좌절에 무릎 꿇은 인간의 머리를 쓰다듬듯. 그리하여 골절된 영혼들을 잠시나마 기립하게 한다.
달의 평지는 바다Maria라고 부른다. 남쪽 바다, 풍요의 바다, 고요의 바다, 맑음의 바다, 비의 바다…… 그 때문일까. 달빛이 내리는 바다가 문득 광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검고 적막한 대지. 출렁이고 울렁이는 땅. 오직 달빛만이 길을 낼 수 있는, 심야의 광야.
달을 보며 자신이 유기되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있다. 버려졌다고 생각해야만 자신의 자리를 사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달빛을 머금고 투명해지는 사람들. 스스로 희박해지는 사람들. 어쩌다 여기 태어난 사람들. 여기가 잘못되었다고 믿는 사람들. 이미 잘못된 사람들. 잘못에 투신하고 헌신하는 사람들. 그러다 심신이 동강 난 사람들. 그래서 뼈의 소리를 듣는 사람들.
사라지고 싶은 이들에게 밤은 유일한 위안이다. 침묵하는 뼈의 소리를 듣는 시간이다. 달이 지구로부터 멀어지는 소리, 시계태엽 소리를 듣는 시간이다. 이들은 달에 손가락을 대고 제 지문을 인식시키며 여기가 아닌 저기가 열리길 소망한다. 그러나 그 지문은 이미 너무 닳았고, 소망할수록 더 닳아간다. 지문이 해독되지 않는 영혼들. 발가락이 몇 없는 채로 태어나 절뚝이는 영혼들. 맑아지되 사라지지 않는 영혼들. 그런 영혼들은 달로 간다.
그렇게 우리는 간다.